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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2. <요재공>고의사진용교위행의흥위부장부곡공휘정의비명(故義士進勇校尉行義興衛部將釜谷公諱廷義碑銘)
1. 문헌 목록 〉14. 14世 〉4. <요재공>임진의병장순창조공정의창의관봉안문(壬辰義兵將淳昌趙公廷義彰義館奉安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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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요재공>진용교위행의흥위부장임진의병장조공휘정의순국비(進勇校尉行義興衛部將壬辰義兵將趙公諱廷義殉國碑)
진용교위행의흥위부장임진의병장조공휘정의순국비(進勇校尉行義興衛部將壬辰義兵將趙公諱廷義殉國碑) 嗚呼라. 一五九二年 宣祖 二十五年 壬辰 四月 倭賊이 우리나라 東南쪽에 쳐들어와 서울 開城 平壤이 짓밝히고 八道가 塗炭에 빠졌을 때 都元帥 權慄 統制使 李舜臣 義兵將 金千鎰 高敬命 趙憲과 進勇校尉 義興衛 部將 趙公 諱 廷義같은 분이 없었다면 壬丁七年 戰亂의 克服과 宗廟社稷의 無窮한 國運을 어떻게 이어왔으랴. 國防을 責任져야 할 正規軍이 制度的으로만 있었을 뿐 그 實體가 없는 狀況에서 모든 秩序가 무너지고 一身의 安慰를 위해 逃亡간 兵士와 水使가 있었고 王子와 宰臣을 敵將의 손에 넘겨주는 者가 있었으며 監司의 出動命令에 反逆하는 亡國之事가 있었음에도 趙氏 諱 廷義는 身忘國活의 氣慨로 盡忠報國 倡義하여 力戰殉死하였으니 그 忠義를 무엇으로 形言하라. 義兵將 趙公 諱 廷義의 貫은 玉川이고 字는 義之요 號는 釜谷이다. 公은 玉川府院君 忠獻公 諱 元吉의 後로 通訓大夫 海南縣監 清菴公 諱 之漢의 孫이요 贈 兵曹參判 兵曹佐郎 諱 瓘의 長子로 一五四六年 明宗 元年 丙午에 태어나셨다. 公은 天姿가 英偉하고 識量이 過人하였으며 一五六八年 宣祖 一年 戊辰에 登武科하여 累進 進勇校尉 行 義興衛 部將을 歷任하였다. 一五七七年 宣祖 十年 丁丑에 父親 兵曹參判의 喪을 당하여 故鄉에 온 후 公은 매양 위연히 歎息하시기를 「大丈夫 世上에 태어나 때를 만나지 못함은 利刃이 匣속에 감추어 있는 것과 같다.」 하시더니 壬辰倭亂으로 王이 西幸하고 罪己書를 八道에 發하여 召募義兵하자 公은 「盡忠 報國하고 力守 邊城하여 虜不敢近 이어늘 倭賊에게 國土를 짓밟게 나둘 수 있겠느냐.」고 憤然히 義旅를 倡起하여 前歷 義興衛 部將으로 寶城 郡兵의 軍事를 圖謀하시었다. 公은 湖嶺間을 轉鬪하면서 많은 敵을 漸殺하였고 丁酉再亂時 六月十八日 安骨浦(慶南 昌原 熊東面 安骨里) 海戰에서 統制使 元均의 中軍將인 寶城郡守 安弘國이 戰死하자 副將인 公은 軍의 士氣가 沮喪될까 念慮하여 發喪을 아니하고 軍事를 代攝하여 바다에 가득한 敵의 艦隊를 殲滅한 戰略家이셨다. 그 후 統制使 元均의 敗戰으로 倭軍이 바다로부터 上陸하여 南原으로 向함에 公은 軍士를 이끌고 雲峰에 이르러 趙慶男 義兵將과 合兵討敵하다가 衆寡不敵으로 殉國하셨다. 公의 遺事는 湖南節義錄에 歷歷하다. 公은 壬辰亂時 狀況으로 보아 玉浦, 露梁, 閑山 等 各種 戰鬪에도 參戰하고 많은 戰功이 있었을 것임에도 記錄이 無傳하여 詳考할 수 없음이 아쉬운 일이다. 倭賊의 丁酉再侵後 倭 間諜 要時羅의 奸計와 元均의 謀陷으로 李舜臣 將軍을 獄에 가두고 七月十六日 添川梁 海戰에서 三道水軍이 무너져 南海와 順天이 陷落됨에 朝廷에서 水軍을 없애고 陸戰에 臨하라는 指示로 公은 軍士를 이끌고 雪峰에 이르렀는데 八月十二日 倭軍 兵力이 雲峰을 攻略하고 朝明聯合軍이 지키던 南原을 陷落하니 八月 한가위 무렵이다. 公은 享年 五十二歲로 激戰中 殉國하셨다. 戰勢不利하여 體魄을 모시지 못하고 衣服과 신발을 거두어 公의 故鄉인 寶城邑 珠峰里 德山洞 투구봉 밑 乾坐에 墓를 모셨다. 公은 靑風 金氏 護軍 以漢의 女를 娶하여 生 二男하니 長이 僉知 中樞府事 諱雲龍이고 次가 諱 季龍이다. 오늘날 公의 後孫이 玄洲公 諱 彭孫 後의 一支派를 이루어 公을 部將公 派祖로 모신다. 忠烈義士를 받들어 모심이 어찌 子孫만이 道理이랴. 一八二七年 純祖 二十七年 丁亥에 鄉儒 李命源 羅正采 朴箕煥 等 五十余 多士가 忠顯公 安弘國의 祠宇 旌忠祠에 公의 追配를 秦請하였으나 時宜 不得으로 遂意치 못했는데 一八六八年 高宗 五年 書院撤廢令으로 旌忠祠마저 毀撤되어 忘身盡忠한 義兵將 趙公 諱 廷義의 殉國을 公義로 彭德치 못한 當時의 時事가 怨望스럽다 할 것이다. 公의 殉國精神을 어찌 忘却하랴. 一九八七年 光州 儒林이 中心한 忠義士 顯彰會에서 壬辰亂 等 五亂때 倡義한 湖南出身 忠義 烈士의 位牌를 모실 祠宇 彰義館을 光州 花亭洞 公園에 建立하게 되므로서 公의 位牌를 모시게 되었으니 民族의 義氣가 살아 있음이다. 忠義先祖의 功業을 世上에 밝히고 後孫에게 그 遺志를 이으게 함은 人倫의 道理요 宗族의 榮譽이다. 壬亂 四百周年을 맞아 義兵將 趙公 諱 廷義의 殉國碑를 세움에 銘을 請한 化翼 啓喆 啓賢의 뜻이 갸륵하고 先代의 忠義顯彰에 龜鑑이 되는 일이라 辭讓하지 못하였다. 國家의 危難에 身命을 던져 護國의 忠義를 다한 義兵將 趙公 諱 廷義의 大節은 民族史의 礎石으로 萬世에 推仰될 것이고 높게 세운 이 碑는 公의 偉勳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檀紀四四二六(西紀一九九三)年癸酉陰十月 日 湖南忠義士 顯彰會長 光州人 盧地燮 謹記 釜谷公 十二世孫 仝基 謹書 淳昌趙氏 玄洲公派 宗會長 化翼 外 僉宗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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